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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야/발표 시36

국화봉고프러포즈 - 이신율리《시로여는세상》2023년 가을호 국화봉고프러포즈 마드리드 산히네스에서 추로스를 먹던 아침, 터키석 하늘에 태엽을 감았지 몇 바퀴를 돌렸으면 팝콘이 터졌을까 우리가 다시 만났을까 끈적이는 생각에서 발을 빼면 어두 워지는 한강가야 오리 가던 길 되돌아오고 강물 소리 맞춰 봉고 돌아오고 트렁크를 활짝 열었어 풍선이 떠오르는 하늘이 넘쳐났지 그녀는 프릴 없는 원피스를 입고 초코라테 셔터를 눌렀지 펄 립글로스 없이도 사진 잘 받겠다고 오늘 거울은 마 음에 든다고 추로스를 먹던 아침 총소리를 내면서 날아가는 새를 보고 네가 웃었던가 사이프러스 나무 사이로 애드벌룬이 둥둥 떠올랐지 너는 커다란 프릴칼라 블라우스를 입고 제라 늄 화분이 자꾸 시든다고 말했지 크리스마스 앵두 등을 켰어 출렁거리는 여수 밤바다 볼륨 높였지 노란 꽃송이가 불쑥 불쑥 피어나.. 2023. 12. 9.
와플 좋아하세요 - 이신율리《시로여는세상》2023년 가을호 와플 좋아하세요 ​ ​ 오늘 마감, 이라는 글자를 쓰는데 헤어졌던 연인들이 돌아오네요 진주 설탕 덩어리처럼 손님은 쉬지 않고 새롭습니다 ​ 새로 만난 연인들의 생크림이 더 달콤할 리가 그럴 리가 있습니다 접었던 귀를 다시 펴는데 ​ 컴컴한 길을 가는 사람들의 구두코는 반짝이고 저녁과 초코의 관계는 거꾸로 매달린 장미 같아서 잊지 않고 블루베리의 밤이 찾아옵니다 ​ 통 블루베리 와플 주세요 오독오독 씹히는 소리는 감추고 변함없이 쓸모 있는 같은 메뉴 좋습니다 ​ 크림과 크림 사이에서 만난 사람들은 오늘 조기 마감, 전에 영화를 보고 지나가는 강아지를 보면서 와플을 굽고 식히는 과정을 기다리죠 ​ 설탕 대신 소금 뺐어요 단맛은 반복하는 재미죠 와플와플 하면서 꺾어지는 풍선 인형의 손짓이나 골목을 구부리는 고.. 2023. 10. 9.
해파리가 나를 부를 때 - 이신율리 해파리가 나를 부를 때 온몸이 바다인 해파리를 생각해요 헤엄치는 것은 받아쓰기만큼 어려워서 당황하는 양치식 물을 좋아하죠 발끝이 북향을 향해 둥둥 떠내려가는 여름이었어요 소나기가 그친 후 깊은 곳을 찾은 건 우리의 선택이었죠 헤엄치는 걸 잊은 물고기처럼 동생이 먼저 수렁으로 쑤욱 들어갔어요 내가 등을 밀었을 수도 있어요 나는 갈비뼈까지 겁이 많았으니까 물 위로 세 번 솟구칠 때 안녕이라고 말했던 것 같아요 가라앉는 눈빛은 가라앉을 때까지 소중하죠 몇 개의 손이 자라나 손을 흔들뻔했어요 나는 그물에 걸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는 데 세상은 쥐 죽은 듯 고요 했죠 동생 손을 잡고 사라지지 않은 내가 침착했다는 소문은 쐐 기풀처럼 돋아나 빠르게 자라고 엉켜 단물만 들이켰어요 물고기가 목에 걸린 것 같아요 비가 와.. 2023. 7. 13.
2월 4일 오전 5시 51분* 외 6편 - 이신율리 (아르코 창작 기금 발표 지원 선정작) 2월 4일 오전 5시 51분* ​ ​ 듣기 평가 중 ​ 왼쪽 귀를 향해 사라지거나 멀리 있는 귀를 향해 소리가 소리를 지나치는 ​ 미칠 수 없어 차분해지는 계절 을 빌리고 싶다 ​ 악센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환절기는 싸락눈을 몰고 왔다 ​ 포플러 이파리가 발등을 쓸고 갔다 ​ 후드티를 입고 새 학기 마스크를 썼다 주머니에 현기증 나는 단어들을 찔러 넣고 나비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 앞뒤 없이 듣기 평가는 계속되었다 ​ 일상을 일생으로 듣자 스피커에선 비발디의 여름이 출렁 ​ 마우스를 클릭했다 쉬는 시간엔 귀가 열리는 까닭을 모르고 이월과 이월 사이에서 벨이 울렸다 ​ 검색창에 평형이라고 쓰자 기억술과 초록 혈관이 떴다 이 조합은 무엇일까 ​ 사라진 왼쪽이 궁금했다 쉬지 않고 쉬는 시간은 끝이 났다 .. 2023. 3. 17.
화요일에도 별을 굽나요 - 이신율리 ​ 화요일에도 별을 굽나요 물방울 자세 도라지꽃이 있는 힘을 다해 하늘을 터트리면 몸 안의 푸른 물고기가 뛰쳐나와요 손깍지를 끼고 속눈썹으로 부르는 노래는 글썽해지지 않아요 악보 없는 노래는 쓰면서 달고 너무 달아서 쓰다고 소태나무 아래 오래오래 서 있어요 꽃밭 귀퉁이에 도라지 타령 한 자락을 풀어놓았죠 그럴 때 살아 있는 노래가 마디마디 일어서 뒤꿈치가 바삭해지고요 가끔 헌혈 후 받은 영화표 한 장처럼 귀를 생략하기도 합니다만 집중하는 간격과 간격 사이에서 징이 울려요 뒤통수가 무성해지는 화요일은 십 년이 넘은 종합 선물 세트죠 잘못 그린 그림 속으로 물방울 같은 발을 내디디면 별을 굽는 보라의 나라에 닿을 수 있어요 노래는 일곱 번 바람 끝을 돌아온 새카만 풀씨였다죠 풀씨 저 혼자 손톱 밑이 까매질 .. 2023. 3. 3.
5분 간 정차합니다 - 이신율리 5분 간 정차합니다 화분 속에서 민들레가 쑥쑥 올라와요 발등은 부어있고 솜사탕 목걸일 걸었어요 드레스와 립스틱이 문제네요 햇빛 쪽으로만 가는 청량리 행 전철이 동해바다로 가는 무궁화 열차를 보내기 위해 5분 정차합니다 그 시간은 동해바다를 위한 묵념 같기도 한데요 5분 침묵 속에 소란이 끼어들 수 있어요 귓구멍에서 이어폰이 자꾸 빠져 흘러간 노래가 흘러가지 못 한다면 기우뚱 웃지도 못하고 그대로 멈춘 동작의 생각까지 멈춰야 해요 5분을 사전처럼 펼쳐 놓고 스물일곱 번째 행 무궁화 꽃술 사이에 나를 끼워 넣어요 낱말 사이에서 점점 색이 짙어져 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는데 모르는 단어처럼 먼저 화를 내는 쪽이 유리한가요 나무 밑둥을 탕탕 쳐봐요 그럼 포도가 열릴 수 있으니까 무릎 사이에 낀 가방처럼.. 2023. 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