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스장 가는 걸 관두고서 동네 벚꽃 구경을 나섰다.
슬쩍 걸친 얇은 가디건속으로 꽃바람이 스며든다.
입꼬리는 올라갈대로 올라 붙었다. 기분 좋은 모양이다.
공원길로 들어서니 고덕역 입구에 흐드러진 매화 목련 벚꽃이 범벅이다. 환하다.
어둔 길 불 밝히고~ 오호 ~ 흥얼흥얼 궁시렁~
어울리지 않는 노래도 어울리는 밤이다.
이제 자리를 내주는 매화 그 작은 꽃잎이 꽃길을 내고 있다.
그래도 향내는 여전하다.
까만밤에 별스레 하얗게 봉오리를 여는 목련꽃 아래 작은 벤치가 아름답다.
그 아래 이마 튀어나온 단발머리 소녀 앉아있다. 내 눈에만 보인다.
주체 못하던 꿈을 안고 보낸 여고시절
봄날 가득했던 노래를 부르며 간다.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벨텔의 편질 읽노라 ,,, 언제 그 시절과 이렇게나 멀어졌을까
가로등도 살찌는 봄날이다
벚꽃은 밤에 만나야 한다. 넘치는 흥분을 감추기 위해서다.
저 가로등 아래서 감싸 안은 여인을 토닥이는 청년이 있다. 여인은 울고 있는 듯 하다.
저리 흐드러진 꽃그늘에서 그들을 슬프게 하는 일은 무엇일까
빌라가 아름다운 길로 들어서면
유리창에 크리스마스 장식이 붙어있는 찻집이 있다.
지날때마다 손님 하나 없다.
내 가슴이 다 먹먹하다.
곁엔 앵두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담장을 넘누만
주몽 재활원을 지나면 꽃집이 다닥거리는 길이다.
찐보라 수국 화분이 꽃집마다 벙글댄다.
어디서 꽃향기가 기막히다. 천리향이 필땐가?
보랏빛 수국 한송이 사려다 그만두었다.
그 꽃송일 들고서 개나리, 벚꽃길을 어찌 지나겠는가
고덕동 주공 7단지를 향해 걷는다.
밤길이라서 길가에 늘어진 개나리꽃이 아직도 예쁘다.
어떤이는 개나리꽃이 정말 싫단다.
노랑 빛깔도 싫고/ 꽃이 지기 시작하면 푸른 잎이 나오는 것도 싫고/ 꽃이 지는 것이 꽃잎을 누군가 쥐어 뜯어 놓은 것 같아 싫고/ 그렇단다.
어쩌나 나는
노랑색이 좋고/ 노랑을 좋아하는 내가 갑자기 뭔가 잘못한 사람 같고/ 노랑옷이 어울리는 내가 이상한 것 같고/ 그렇다.
앞에 젊은 여인이 커다란 빵 봉지를 들고간다.
꽃길에 빵 봉지가 어울린다.
사뿐거리는 플랫슈즈도 예쁘고 긴머리도 예쁘다.
그 뒤로 음료수를 들고 가는 작은 아저씨도 한가롭다.
멀리 7단지 왕벚꽃이 들썩인다.
이런 왕벚 아래선 정말 번지수를 잊어버려도 좋겠다.
심호흡으로 왕벚 향기를 마신다.
여의도 벚꽃을, 서울대공원 벚꽃을, 워커힐 벚꽃 향기를 기억해낸다.
그러다 하얀 추억을 꼭꼭 접는다.
어둔 길가에선 새끼 고양이가 꼬리를 바짝 세우고
뭉실거리는 등판을 가진 살진 아낙이 벚꽃 아래로 쓰레기 봉투를 던지는 저녁이다.
5단지를 지난다. 고향 친구가 사는 곳이다
잘 웃는 친구를 생각하며 나도 벙실거린다.
아직은 재개발 얘긴 없는 동네다. 이 동네 벚꽃이 근방에선 으뜸이다.
키작은 아파트와 벚나무 키가 같다. 부조화속의 조화로다.
3단지를 들어서는 길은 애틋하다.
IMF 때 3년을 춥게 보낸곳이다.
창문으로 뻗은 벚꽃 가지가 새살 돋아나라고 토닥여 주던 곳이다.
이곳에선 한참을 머뭇거린다. 추억은 아프기도 하고 아름답기도 하다.
길을 건너면 상일동 재래시장이다.
근처에 대형마트가 있지만 가끔 이곳에 온다
오렌지 한 묶음을 사고 팥고물이 듬뿍 묻은 호박 시루떡을 사고 잘익은 바나나를 샀다.
무겁다. 아직 옆구리가 낫지 않은 걸 잊었다.
한참을 걸으니 꼬리뼈에 작은 통증이 온다.
얼른 바나나 하나 뜯어서 비실비실 웃으면서 먹어 치웠다.
그 난중에도 벚꽃과 얘기를 한다. 볼 터진다.
참지 못하고 봄속으로 철쭉도 붉어 뛰쳐 나왔다.
이렇게 봄꽃이 한번에 다 펴버리면
나도 더 쉬 늙어 버릴 것 같은데..
빨간 신호가 끝나면 좌회전이다.
좌회전이 지나면 푸른 신호다
건너는 내내 깜박거리는 신호가 푸른 꽃을 피운다.
아직도 내 입꼬리는 눈가를 향해 가고 있다.
온 몸에 꽃향기를 묻힌 나비 한마리
날개를 접는 봄밤이다.
2015년 4월 8일 살구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