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숙노*
- 이신율리
소매 길이를 잰다 풀어진 머리칼을 제치면서 잰다 짜증 낼 수 없다 귀신은 아무 때나 팔을 내주지 않으니까
버선을 넣어 만든 액자가 기울어 새벽종이 울린다 애썼다고 입에 땅콩 알사탕을 넣어준다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귀신은 존댓말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귀신이 잘 보여 존댓말을 모른다
귀신은 옷고름 길이가 봄날보다 짧다고 투정했다 할머니는 섭섭해서 남산에서 목련처럼 울었다 붉은 치마가 더 붉은 날이었다
귀신은 금박을 무서워한다 금박 속에 귀신이 산다고 믿는다 할머니는 좋아한다 샛노란 끝동에 복복福자를 찍었다 귀신처럼 감쪽같다 할머니가 귀신처럼 웃는다
소매에서 팔을 뺄 때마다 팔이 자꾸 생겨났다 쉬지 않고 팔을 만든다
이제 색깔 옷은 지겹다고 할머니는 종로 3가 골목이 꽉 차도록 검은색 당초무늬 갑사를 펄럭거렸다 이상하게 어둡지 않아
목이 쉬도록 종이 울렸다
긴 치마에 밟혀 넘어져도 귀신은 씩씩하게 팔을 내밀었다 알사탕을 물리고 할머니는 숱 없는 머리칼을 쓸어 넘기면서 밤새도록, 그림자 없이 바느질이다
* 한복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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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사이펀』2021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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