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소
- 이신율리
봄이 오면 아버지는 염소 새끼를 끌고 왔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내 다리를 묶었
어 냉이꽃 들판을 휘돌아 쳐도 심통은 풀리지 않았지 염소는 뒤꼍에 꽁꽁 묶어놓
고 닭장 속에 갇힌 거위 등에 올라타 마징가 제트처럼 날고 싶었지 뿔 자리가 아
직 벌어지지도 않은 애송이가 대가리를 번쩍 쳐들어 내 봄을 파먹었어 딱 한 번
이라도 배때기를 걷어차 풀밭에 쫙 뻗었어야 했는데 그때 내 눈엔 네가 아버지로
보였어 수업료 안 냈다고 벌서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거든
*
하얀 꽃은 구겨 삼키고 싶다 구름 아래 냉이꽃을 꺾는다 최신 가요에 맞춰 춤을
추면 봄비가 내릴 거라고, 점점 하늘이 내려오고 뿔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지겹다고 화성으로 날라버린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쭉 빠진 알파고 옆에
끼고 앉아 화산에서 감자를 굽고 있었다 나는 순하게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지하
철 2호선 티켓을 보여줘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염병할! 그를 닮은 아이 하나 다
운받아야겠다
*
굽 높은 발이 냉이꽃은 밟지 않았다 풀밭에 누워 우리, 화성의 기운이 넘치는 염소
자리나 찾아볼까 아니면 뿔과 혼선된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면서 매리너스 협곡에
투망을 던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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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시와 편견》 2021년 겨울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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