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신율리, 「비 오는 날의 스페인」,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2021년 6월호(2020, June)
주체적 존재로서의 사물들(4)
- 이성적 논리적 상상력과 감성적 체험적 상상력
(이신율리의 「비 오는 날의 스페인」과 백가경의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에 대하여)
김명철 시인
이 글에서는 2022년 신춘문예 당선시들 중 사물과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 확연히 다른 두 편을 선정하여, 두 시편에 나타난 상상력의 성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시인의 상상력은 실제의 현상에 기인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시인광장의 앞선 포엠리뷰들에서 그 근거를 생명의 기원이라는 관점에서 여러 차례 언급해왔다. 시인들이 나누는 사물과의 대화들에서 우리는 각 시인들의 상상의 발원에 대한 하나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신예 시인들의 새로운 목소리가 전하는 사물의 소리를 들어보자.
1. 이성적- 논리적 상상력의 세계
우리의 존재는 3차원에 속해있지만 우리의 생활은 다차원적이다. 21세기 IT, AI 산업의 혁명이 우리의 생활에 전반적으로 침투하여 4차원적 세계를 가속화시키고 있지만, 어쩌면 인간 존속 자체가 다차원의 세계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물리적 생활은 물론 정신적 관계까지를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수학적(기하학적) 차원이라는 방식만으로는 ‘우리’를 설명할 수 없다. 사실 이미 시적 상상력이 어느 차원에 갇힐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없다. 백가경 시인의 「하이퍼규브에 관한 기록」은 어느 차원에도 갇혀 있지 않은 시적 상상의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백가경 시인의 ‘하이퍼큐브’에 대한 상상의 세계는 정글짐에서부터 시작된다. 정글짐으로 표상된 3차원의 세계는 이 시에서 그 차원에만 국한되어 나타나지 않는다. 각 차원들의 모습이 다른 차원으로 전이나 변형되면서 선형적 혹은 평면적 도약이나 나아가 공간적 이탈이나 역행도 발생하는 것이다. 사실 3차원의 세계에서 온전한 입체 형태라는 것도 있을 수 없지 않는가. 있는 그대로 말하건대, 우리의 삶의 모습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시간이 선형적이라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상대적이고, 공간이 입체적이라지만 일그러지고 누락된 형상이지 않은가.
시인은 x, y, z축을 갖는 수학적-기하학적 좌표공간을 통해 우리의 차원에 대한 논리 정연한 해명을 시도한다. 어린이 놀이터에 있는 정글짐은 육면체라는 3차원적 입방체들의 결합이다. 정글짐에 오르면 우리는 2차원적 전후좌우로의 움직임은 물론 그 위 또는 아래에서 일상의 3차원적 좌표공간에 머물 수 있다. 그런데 시인은 이 3차원의 세계에서 우리를 탈출시키려는 놀라운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상상의 세계에서 우리는 우리 각자를 하나의 고정된 ‘점’이라는 0차원에 고정시키지 못한다. ‘너’라는 1차원이 있고, ‘우리’라는 2차원이 있다면, ‘그들’이라는 3차원은 물론 ‘미지의 인간’이라는 초-차원, 하이퍼큐브(초입방체)의 세계가 있다.
1920년 변호사 세바스챤 힐튼은 어린이들에게 3차원 공간에 대한 기초적 이해를 돕고자 정글짐을 발명했다
*
x가 머리 위에 달린 축을 오른손으로 잡고 있다 높이를 미처 재지 못한 x의 발이 바닥에 거의 닿을락 말락 누군가 실컷 타다 뛰어내린 그네처럼 어안이 벙벙하다 x의 팔과 다리가 점점 빠르게 버둥거린다 x는 하나의 커다랗고 검은 점이 되는가 싶더니 그 어떤 축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x값이 무한 증폭된다
y님 행복을 주는 치과 생일 축하드립니다. 임플란트 10% 할인 1
어떻게, 잘 지내? 1
은평구도서관 ‘세상의 끝’ 연체 49일 빠른 반납 요망 1
소액 대출 최저 이율로 신용등급 모두 가능
y는 몸을 정육면체 안으로 구겨 넣는다 점점 y값을 잴 수 없고 그럴수록 y는 생각한다
이 모든 되풀이는 나의 결과 값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
z의 미래 값: 직사각형 화장실 천장에 도시가스 공급관이 노출돼 있음 장판과 텐트 사이 혈액이 말라붙어 표백제와 기타 용액을 계산한 것보다 한 통 더 사용함 청구 예정
z의 현재 값: 중위소득 85% 이하 가정에서 자란 3학년 C반
*
발가락 하나로 자신의 목숨을 지탱한 x는 같은 위치 옥상에 사는 주민이자 애인 z를 찾아 창백한 타일로부터 그를 무한 증식시킨다 열화 과정에서 z는 기체로 변할 수 있게 되고 y가 연체한 ‘세상의 끝’을 대신 반납한 후 49일을 1초 만에 앞당겨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y가 연탄과 소주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을 때 자연스럽게 제목을 볼 수 있도록 책을 비스듬히 세워놓는 것을 잊지 않는다
*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질문을 시작한다
말을 끊어서 미안하지만 여러분 어떻게 연결되었으며 이런 건 어떻게 알게 되었나요?
세 어린이 동시에 말한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연구소장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린이들 모르게 언어 변환 버튼을 누른 후 짧게 욕을 한다
그렇다면 당신들의 능력은 어떤 문헌에서 찾은 것인가요?
어린이 일동, 문헌에서 찾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 Hypercube 4차원에서 모든 변의 길이가 같은 도형, 10개 이상의 처리기를 병렬로 동작시키는 컴퓨터의 논리 구조
- 백가경,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우리의 생활은 x처럼 “어안이 벙벙”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발이 바닥에 닿을락 말락하는 난감한 상황, 버둥거릴 수밖에 없는 불가해한 경우는 우리의 삶에서 수시로 발생한다. 하나의 검은 점이 되어 차라리 고립되고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이때의 심정은 절망적이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생활은 y와도 같다. 진심이 느껴지지 않는 문자들이 핸드폰에 부지기수로 날아든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네 개의 문자들에서 시인이 주목하고 있는 내용이 심상치가 않다. 아직 문자를 열어보지 않은 “생일”과 “‘세상의 끝’”이 “잘 지내”느냐는 물음을 사이에 두고 직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소액 대출”만 열린 것을 보면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경제적 문제가 더 시급한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세상의 끝’이라니. 이런 절망이 또 있는가. 결국 y는 고립되어 자신의 존재 가치를 헤아릴 수 없게 된다. 과연 y는 ‘경제적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z의 현재 값은 그렇다 쳐도 그의 미래 값에 더 이상의 절망이 있을 수 없다. 화장실 천장의 노출된 도시가스 공급관과 말라붙은 혈액 등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다음 연에서는 우리를 더욱 더 긴장시킨다. z는 열화과정에서 기체로 사라지고, x는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하고, Y는 연탄과 소주를 사온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들인가. 화장(火葬)이 떠오르고, 유서가 암시되며, 자발적 죽음이 연상되는 것은 감상의 과잉일까, 아니면 정말 절망을 넘어 파국이란 말인가.
그런데 여기까지 진행된 세 어린이의 모습은 사실 ‘어린이’의 모습이 아니다. z의 현재 값이 “3학년 C반”으로는 언급되어 있으나, ‘세상의 끝’이라는 서명이나, ‘소액 대출’이라거나, ‘(경제적) 자유’ 같은 표현들은 어린이의 언어들이 아니다. 다음 연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x는 ‘주민이자 애인’인 z를 찾아가고 y가 연체한 책을 반납한 후 ‘세상의 끝 역자 후기’를 대출한다. 게다가 y는 ‘연탄과 소수’를 담아 온 마트 봉지를 쓰레기통에 넣는다. 모두 성인들의 모습인 것이다. 이는 단순한 시간의 역전이나 혼란이 아니다. 선형적 2차원으로서의 시간성이 다차원화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 어린이의 과거의 모습은 현재의 모습이며 어제의 탄생이 곧 오늘의 죽음이 된다. 시인의 시각으로는 ‘(경제적) 자유’를 얻기 위해 이 모든 상황들이 시간적 순서 없이 ‘동시에’ “되풀이” 되고 있는 것이다. 하나의 검은 점이 되었던 x의 0차원,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일직선으로 보여준 y의 2차원, 3학년 C반인 z의 3차원, 또 우리가 체험할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거나 무한 증폭되는 x, y, z의 4차원이 공존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은 x, y, z 세 어린이를 ‘한 차원’에 모아 두고, 이 모든 일들이 어떻게 일어나는냐는 질문을 시작한다. 어린이들의 대답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게 ‘우리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일’이라고.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이지 않은가.
이 시에서 시인은 x이거나, y이거나, z일 수 있다. 아니면 그 모두 일 수도 있다. 더 나아간다면 어쩌면 시인은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도 x, y, z일 수 있고 범우주아카이빙센터 12호 연구소장이 될 수 있다. 다차원의 세계를 종이나 횡으로 가르고 그 세계를 또 지켜보는 자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3차원의 세계를 탈출한 것이 아닌가.
이 시에서 백가경 시인은 수학적 차원 이론을 일상의 차원 이론으로 “무한 증폭”시켰다. 이성적 논리의 상상력이 감성이 대세를 이루는 시적 상상력의 세계에 의미심장한 파문을 일으킨다. 시는 시대상황,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않을 수 없고, 어쩌면 그래야만 할 당위성도 있다. 지금은 낯설지만 머지않아 도래하게 될 AI 시대의 흔하게 될 감성이 한층 당겨진 것만 같다.
「하이퍼규브에 관한 기록」은 정신적 물질적으로 궁핍한 현대를 살아가는 ‘절망’의 시다. 우리는 이 시에서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죽음’을 불안과 초조함을 갖고 목격했다. 이 ‘죽음’을 우리는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2. 감성적- 체험적 상상력의 세계
인류의 미래, 나의 미래는 안전한가. 여전히 코로나 19는 강력하다. 그것은 어쩌면 인류에게 일회적 재앙이 아닐 것 같기도 하다. 바이러스의 새로운 변이의 출현은 물론 코로나보다 더 강력한 바이러스의 출현에 대한 예견들은 우리의 미래를 암담하게 한다. 그나마 전 세계적으로 팬데믹이 완만하게 잦아들고 있어 다행이지만, 최근의 ‘원숭이두창’이란 또 뭔가. 게다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전 인류가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원자재 가격의 상승으로 인한 전 세계 경제계의 불안정은 물론 곡물 수급 단절로 인해 벌써부터 몇몇 나라에는 기아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는 실정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우리는 매일매일 죽음에 대해 듣는다. 제2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단다. 미국에서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에서 한국에서 북한에서 코로나로 인한 사망 소식이 끊임없이 보고된다. 이렇게 많은 죽음의 소식을 들었던 적이 있었던가. 차량전복이나 화재로 인해 몇 명 혹은 몇 십 명이 사망했다는 뉴스는 뉴스도 아니게 되었다.
팬데믹 이전이라면 그렇게 많은 죽음의 소식에 대해 우리는 경악했을 것이고 두려워했을 것이며 ‘내가 아니다’라는 안도의 한숨 속에서 어쩌면 가느다란 감사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죽음이 죽음이 아니게 되었다. 죽음은 일상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늘, 날마다 사람들의 죽음이 이어지니 그 사이 사이에 비도 내리고 해가 뜨고 눈도 내리는 것인지, 아니면 비나 눈이 내리니 그 사이에 사람이 죽는 것인지도 모르는 일이 되었다.
이신율리 시인은 「비 오는 날의 스페인」에서 우리에게 ‘죽음은 비’가 되었다고 선언한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에게 죽음은 비=사과=수세미=미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도 하나의 사물이 된 것이다. 시인은 죽음이 사물화된 것에 대하여 혹은 죽음을 사물화시키면서 담대하면서도 재미있지만 그러나 안타까움과 우려의 심정을 넣어 우리에게 전해준다.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에서 속옷과 영양제를 건져 올렸다 첫사랑의 정기구독은 해지했다
꽃병에 심야버스를 꽂았다 팔다리가 습관적으로 생겨나는 월요일, 아플 때마다 키가 자라는 일은 선물이었다
불꽃이 튀어도 겁나지 않은 나이는 이벤트였지
단풍 들지 않는 우리를 단양이 부른다 스페인은 멀고
안전벨트를 매고 접힌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는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난다
-이신율리, 「비 오는 날의 스페인」,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로 시작되는 이 시도 ‘죽음’에 대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죽는다’는 언급은 시 전문을 통해 두 번에 그칠 뿐이다. 그나마 그 죽음들마저 비나 수세미나 사과나 들기름과 같은 일상의 사물들 ‘사이’에 겨우 끼어있을 정도다.
비는 내리고 그 사이 사람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시인은 죽음에도 삶에도 필요한 사과(謝過)를 떠올린다. 이 사과를 시인은 가볍게 사과(沙果)로 전이시킨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화두가 코바늘에 걸리는 수세미나 사과처럼 사물화가 되고 있는 중이다.(사실 전혀 모르는 타인의 죽음에 대한 우리의 감정을 보라. 이것이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대할 때의 태도이며 실제 경험이지 않은가) 죽음은 수세미를 지나 날씨를 핑계로 전(煎)으로 향한다. 미나리와 오징어를 넣은 전을 부치는 장면은 흡사 무슨 작은 잔치라도 벌릴 것처럼 흥겹기까지 하다. 죽음이 잔치가 되다니! 시인도 놀랐는지 그는 한번만 더 죽음을 상기한다.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시인은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리는 것과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 것의 차이점을 애써 구분하려고 한다. 뒷문장의 앞에 “다행히”를 넣어 죽는 사람들보다 비 내리는 날이 더 많다고 변호 아닌 변호를 하고 있지만, 사실 실제 죽음의 수(數)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앞 문장에서 비는 이미 ‘날마다’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 언급된 죽음도 곧바로 올리브 병의 들기름이나 사과나무에 열린 복숭아처럼 얼토당토않은 상상의 놀이로 전환된다. 이 상상 놀이는 급기야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기까지 한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시인은 비가 오면 안 될 게 없다고 말한다.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하니, 다시 말해서 비=죽음이니 안 될 게 없다는 것이다. 이 선언은 현실과 비현실, 가능과 불가능,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들에 대한 절대적인 기준이 결국 生/死로 결정된다는 것을 강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사람이 그토록 죽어나가는 마당에 다른 기준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런 와중에 과거를 그리는 시인의 회고는 환상적이다. 그런데 그 환상은 아름답지 않다. 셔터를 내리는 닭 날개와 오토바이를 탄 새, 꽃병에 꽂는 심야버스의 이미지들은 첫사랑의 정기구독을 해지한 ‘철든 애’의 아픈 자화상들이다. 시인은 청춘의 “불꽃”이 이벤트였을 뿐, 지속적이지도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담담히 전한다.(사실 이런 과정은 당연히 겪게 되는 통과의례적 감성이며 체험이 아닌가)
시인은 우리가 단풍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색종이처럼 사진을 찍을 수 있다고 말한다. 비가 내리는 날이 많고 사람이 죽기도 한다는데, 우리는 코바늘로 즐거운 뜨개질도 하고, 비는 내리고, 흥얼흥얼 전도 부치자고 말한다. 비가 와서 안 될 게 없으니, 가끔 떨어져 있자고도 한다.
이 시는 죽음이라는 ‘무게’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우리를 미소 짓게 한다. 전을 부칠 때의 장난기는 웃음까지 슬며시 새어나오게 한다. 하지만 이 장난은 경박스럽지 않고 단정하며 온후하다. 죽음이라는 무게가 장난이라는 가벼움에 둘러싸여 살짝 발을 들어 올리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하다.
그런데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에서는 마음이 가라앉고 숙연해진다. 안 될 게 없다고 해서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며,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절망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비=죽음이 오고 있지만 시인은 단풍들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항의 표시가 아니라 동반(同伴)처럼 들린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도 안전벨트를 매고, 색종이처럼 사진도 찍으며, 가까운 어디에라도 가고 싶어진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누군가 멀리 떠나”가고 있지만.
신예 시인들의 두 편의 시를 읽었다. 한 편은 ‘정글짐’, 다른 한 편은 ‘비’라는 사물을 통해 양 극단으로 향하는 상상력의 향방을 볼 수 있었다. 두 편 모두 ‘죽음’이라는 그늘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한편은 탁한 그늘이었고 다른 한편은 맑은 그늘이었다. 이는 사물을 대하는 시인의 태도, ‘이성적-논리적’이냐 아니면 ‘감성적-체험적’이냐에 따라 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단순히 시인을 둘러싼 환경의 차이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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