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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야/발표 시

아르코 발표 지원 선정 - 안개의 노래외 6편 이신율리

by 이신율리 2024. 8. 8.


아르코 발표 지원 선정 - 안개의 노래외 6편 이신율리

 

 

안개의 노래

풀이 나지 않는 사각지대에서 안개가 태어난다

멜로디와 발굽을 감춘 세계가 돋아난다

이곳은 풀밭이 뛰어다니거나

발굽을 잃어버리는 것은 흔한 일이다

엎드린 저녁은 기도를 모르지

풀밭을 덮는 폭설을 모르지

양의 기분은 묻지 않는다

멀리 있는 평안을 바라봐야 하니까

양의 목소리를 닮기 위해

뒤꿈치를 들고 여러 번 마른풀을 읽고 지나간다

양 너머에서 안개의 노래가 깊어진다

여럿이서 혼자가 되는 안개의 시간

양 한 마리 겨우 들어갈 만큼 좁거나

끝을 알 수 없을 만큼 넓은 곳에서

출렁거리는 양 떼처럼 노래를 부른다

조금 있으면 성자가 나타날 것이다

어제 날아온 새가 다시 날아올 것이다

뛰어다니던 풀밭은 풀밭으로

잃어버린 발굽은 무너지지 않는 발굽으로

고요한 양은 없어

흰 양이 태어나겠지

잡히지 않는 성자의 옷깃을 잡고

집중해서 길을 잃으면

종소리가 멀어지면

눈으로만 풀을 뜯는 시절이 가고

먼 곳에서부터 찔레꽃이 우거지겠지

태양을 몇 조각으로 나눈 오후에는

잘 말린 안개 밖으로 노랫소리 깊어지겠지

 

 

MRI

나를 깨우는 머리가 여러 갈래로 돋아난다

나비 핀을 꽂으면 나비가 날아오고

더듬이를 만지면 누군가의 눈꺼풀을 만지는 것

이끼가 돋는 머리를 지우고 싶은데

자꾸 옥잠화가 핀다

도착하는 내가 지워지고 있다

지웠던 기억이 돋아날 때까지만 살기로 하자 우리

속도엔 봄이 없으니까

오늘도 슬픈 해가 떴다

옥잠화를 굽는다

채도 없이 눈꺼풀이 떨리는 건

건조한 왼쪽이 왼쪽으로 끼어드는 건

아는 얼굴은 다 말라버려서

무거운 꽃다발로 친구 신청을 한다

나비가 뿔을 적실 때에도

옥잠화는 아침을 지우는 중

지웠던 것들이 거기 있었어, 하고 물을 때

거기라는 걸 기억할 수 있을까

정지된 리듬처럼

도착하지 않은 내가 팔랑거렸다

무늬 없는 잠이 쏟아지도록 무늬가 자랄 거야

나비 한 묶음이 꽃가루가 될 때까지

생략한 나를 통과한 후

보라색 채소를 먹어야 한다는 새 잠언이 전광판에 떴다

모래색 나비를 꺼냈다

화면이 꺼지고 현기증 나는 오후가 갠다

 

 

 

Green hands

안나는 내 손을 보고 Green hands라고 했다

손끝에서 믿음이 돋아난다고

죽어가는 식물을 살린 적 없다

무너지고 다짐하는 것이 믿음인가

분갈이가 필요한 달의 뒷면에 박수라도

우수수 이파리가 쏟아진다

죽음 이후 진화하는

뿌리 없이도 죽지 않는 화분을 본다

줄기를 잘라 화분에 의심을 꽂는다

물을 주고 의심은 의심하지 않고 자라서

발을 뻗고 잠이 쏟아지고 잎이 돋는 꿈을 꾸다가

지루해서 얼굴 큰 수국이 피고

풀물을 모르면서 안나는 숲을 그린다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 풀물 같다

풀을 뜯어 손등에 문질러 보여줬다

힘줄이 돋는 자리에 풀물이 들었다

피가 도는 자리가 새로웠다

풀물을 모르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아서 웃지 않았다

웃어서 초록인 걸 프랑스어로 어떻게 말할까

프랑스에는 연꽃이 없다

모네의 수련이 핀다

연밥에 물감을 찍어 연꽃을 그린다

새로운 시도는 수다스럽거나 의심스럽다

식물로부터 위로 대신

위태로운 여름을 오려 내는 것처럼

풀물을 모른 체 안나는 프랑스로 갔다

나는 쓸쓸해서 풀물을 찾아갔다

연꽃 속에서 안나는 연꽃을 그리고

풀물은 안나의 색이 되고

여름비가 오고

무기력했던 손이 쑥쑥 자랐다

죽어가는 제라늄 화분을 샀다

죽지 않는 초능력을 골랐다 물 조심하라는 소리를 들었다

손끝에서 가지를 뻗는 믿음으로 나는

풀물 든 손을 주문했다

 

 

 

밍톈*

오토바이가 일제히 출발했다

악보 없이 연주하는 시나위처럼

하롱베이엔 더 많은 오토바이가 있다고 네가 말했고

나는 오토바이가 사라질 때까지

연주가 끝나지 않은 것처럼 서 있었다

사라져도 좋은 것들이 천천히 사라지는

풍등 날리기 좋은 날씨였다

여기도 복사꽃이 피네

높게 핀 그늘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상하게 나왔다고 서로 아닌 것 같다고

모르는 사람처럼 우리는

낯선 사람이 되어갔다

길가에서 자라는 화분은 꽃이 잘 피는 것 같아

잘 자라는 것처럼 네가 말했다

어디든 섭섭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뿌리 없는 식물처럼 우리는 잘 자랐다

모르는 나무에 이름을 붙여주었다 밍톈,

몇 번을 불러도 꽃이 피지 않을 것 같아서

내일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그늘 없는 푸른 의자에 앉아서

화남으로 불어오는 플라스틱 바람을 맞았다

천만에요 괜찮습니다

이국의 말을 알려줬지만

너는 딴 생각을 하느라 친절하게 미안했고

우리가 날린 풍등이 소원과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고수를 넣은 땅콩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이끼 맛이 나는 마을을 돌아다녔다

미끄러운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우리는 이제 미끄러질 마음이 없어서

아이스크림이 손등을 타고 녹아내렸다

*대만어로 내일

 

아무르고양이

모르는 애가 인사를 한다 아는 사람이 된다

보라색 샌들을 신었다 눈길에 어울리는 애가 된다

모르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은 같아서 우리는

황색 신호를 느리게 건너갔다

심호흡하기 좋은 안개 속에서

모르는 개가 꼬리 치는 건 길고양이보다 낫다는 말인가

밤새 기묘한 소리로 울부짖던 고양이는 고양이로 번져가고

나는 일주일에 다섯 번씩 꿈을 꾸고

도시에서 멀거나 가까운 이곳도 도시라고 부른다

오래된 세탁소가 있고 동전 빨래방이 자꾸 생기는데

이민 온 것 같아 깔끔한 동네 어울림 아파트

소방서 옆에는 학교가 줄지어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지은 걸까

쓸데없는 생각은 언제나 쓸데없지만

월세 놓기 좋은 곳이래요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었어요

몰래 고양이 밥을 주는 여자가 돌아본다

나는 물그릇처럼 서있다

고양이는 보이지 않고 밥은 수북하고

고양이집 문을 닫는다 고양이가 닫힌다

돌멩이처럼 우리는 고양이를 아낀다

길 건너 담쟁이넝쿨 속에는

아무르연구소가 있다

쓰러진 우편함 속에는

은빛 아반떼와 젖지 않는 편지가 있고

유령을 보는 고양이가 있고

모르는 애가 인사를 한다

충분히 모르는 사람이 된다 괜찮았다

괜찮은 채로 우리는 유령처럼

아무도 모르게 아무르고양이를 기다렸다

 

 

 

 

자율

모의고사 허탕 치고 카레로 돌아왔다 긍정적인 에버랜드 너무 멀고

지치지 않는 어른들의 세계에서 자율을 빼면 아버지는 이제 새로운 사람 이해하는 엄마는 간단하게 두꺼워지고

위로를 배운 적은 없지만 나는 점점 규칙적인 내가 되어서 집으로 가는 길은 멀미가 나 오래 달리는 것처럼

상처가 중심이 되면 이 세계 밖으로 자랄 수 있을까

무성하게 죽은 나무를 지나 모두 다 있어도 아무것도 없는 다이소를 지나 흰 얼굴이 창백한 얼굴을 쳐다보면

서 단백질과 관계 넘치는 우리 카레 먹자

벽에 붙은 그림 속에선 무표정한 얼굴이 원반을 던진다 완벽한 자세라고 너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고

스머프 좋아하잖아요 푸른 돌로 스머프 깎아드릴게요

힘껏 원반을 던진다 손목을 다치고 돌아오지 않는 무표정한 얼굴을 걱정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오의 카레를 끄고 초대하지 않은 희망 음악을 산책한다

 

금광촌 이야기

해 뜨는 곳에선 누가 누가 태어나나요

벌컥 화를 내는 지팡이 좀 치워주세요

금광촌으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어린 내가

새파랗게 멀미를 했다네요 기차는 자꾸 길어지고

집으로 돌아가긴 틀렸다고 발을 동동 굴렀는데

먼지 날리는 그곳에서 한여름을 자랐어요

꿈속에선 안전 주의 표지판이 얼굴 위로 쓰러지고

깨고 나면 장독대에서 고추장을 찍어 먹었다네요

죽지 않고 따라다니는 사소한 이야기죠

우편배달부가 오는 날에는

기다릴 것도 없는 나는 노래를 불렀고요

금싸라기 한 톨 모르면서

희망가를 불렀다네요

이 풍진 세상 모란도 꽃밭도 없이

마른 핏줄 속에서 출렁거렸던 가락이라니

나보다 먼저 태어난 기차는 무럭무럭 자라서

멀미를 끼고 어둠을 횡단해요

터널을 지나 벚꽃 날리는 저수지를 돌아

새벽은 쉬지 않고 컴컴해지는데

깨어있는 사람은 언제 잠을 자나요

손잡지 않고 미끄러지기 전 그때가 가장 환했던가요

이젠 그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당신이 말합니다

그만이라는 말 아래 자라는 것들이 있어요

마당가의 채송화는 풀을 먹고 자라고

내가 태어나서 기차가 자라고

금광촌 이야기가 자라고 있어요

끝은 어디서부터 시작인가요

눈 감으면 금빛 밀가루가 폭설처럼 쏟아져요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문장 웹진

* 이신율리

2019년 오장환신인문학상

2022년 세계일보신춘문예 당선

 

 

 

2022년 처음으로 실행한 아르코에서 미발표작 7편이 선정되어 발표지원금을 받았다.

2년이 지나 다시 신청했는데 또 되었다.

지면에 발표하는 일이 하도 어려워서 거의 일 년 만에 7편을 발표하게 되었다.

더운 여름 감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