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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야/발표 시

영광 택시 - 이신율리 《열린 시학》2022년 여름호

by 이신율리 2022. 7. 11.

영광 택시

- 이신율리  

 

 

 

발걸음을 세는 일은 맑거나 흐려지는 날씨

그걸 숫자로 바꾸는 일은 잘라버린 꼬리가 자라는 동안

 

뒤축이 닳은 미터기를 고친다

 

행진곡을 따라 떠났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난 이제 지도가 없어요

어떤 꼬리들도 그렇다

 

미터기 속

아이 웃음소리가 살고 새로 난 길이

가라앉거나 떠오르지 않는 살림살이가

좌표도 없이 떠 있다

답은 0이 되거나 밥이 익는다

 

해나고 바람 불지 않아도 뒤축이 닳는 오늘

반숙 달걀이 첫눈 내리는 표정처럼 명랑할 수 있다면

돼지비계의 마술처럼 사월이 끓거나 씀바귀처럼 알약이 써도 되겠지

더 이상 소화할 것이 없을 때

 

빈 영수증에 얼굴을 덜어 적는다

빨간 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숫자는 자다가 그린 그림 같아

겹치는 색이 많을수록 정지 버튼을 눌러

공터마다 옮겨 피는 봉숭아가 된다

 

발길이 뜸한 열두 시 잘린 꼬리가 자라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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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열린시학』 2022년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