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나비야, 나야/발표 시

2월 4일 오전 5시 51분* 외 6편 - 이신율리 (아르코 창작 기금 발표 지원 선정작)

by 이신율리 2023. 3. 17.

2월 4일 오전 5시 51분*

듣기 평가 중

왼쪽 귀를 향해 사라지거나

멀리 있는 귀를 향해

소리가 소리를 지나치는

미칠 수 없어 차분해지는 계절

을 빌리고 싶다

악센트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환절기는 싸락눈을 몰고 왔다

포플러 이파리가 발등을 쓸고 갔다

후드티를 입고 새 학기 마스크를 썼다

주머니에 현기증 나는 단어들을 찔러 넣고

나비는 아직 출발하지 않았다

앞뒤 없이 듣기 평가는 계속되었다

일상을 일생으로 듣자 스피커에선

비발디의 여름이 출렁

마우스를 클릭했다

쉬는 시간엔 귀가 열리는 까닭을 모르고

이월과 이월 사이에서 벨이 울렸다

검색창에 평형이라고 쓰자

기억술과 초록 혈관이 떴다

이 조합은 무엇일까

사라진 왼쪽이 궁금했다

쉬지 않고 쉬는 시간은 끝이 났다

성에 낀 창문에 커다란 날개를 그렸다

목 짧은 양말을 끌어 올리고

가짜 양털 부츠는 주저앉았다

초록은 무작위로 건너뛰고

본명 대신 필명을 적었다

오른쪽 귀에서부터

있어도 없는 날까지 봄이 풀렸다

 

 

 

* 2022, 입춘첩 붙이는 시간

그런데 건우가 몇 살인가요?

고양이 없는 골목을 그려요 검은 고양이 색으로

세 칸짜리 사다리와 딸기 망치는 검정 사인펜

바나나 씨앗을 품고 있는 흙은 흑색을 골라

검은 얼굴에 검은 넥타이 까만 축구공까지

나이키 어린이 디자이너가 그린

먹물 그림 아빠 운동화 멋지잖아요

검정보다 더 어두운 빨강을 떠올려요 이상하지만

그건 누나의 생각이죠

사생대회 상장 마음입니다

혼자 웃느라 잃어버린 자세는 24색에서 골라요

예리한 관찰력에서 태어난 십이월의 색

빛을 넘어 빛이 없는 빛까지 쫓아가도

미세 플라스틱과 미세 자폐의 관계는 잘 몰라요

풍선을 삼키거나 비닐봉지를 뜯는 동물들이

꿈속에서 내게 자일리톨 사탕을 던져요

내 얼굴은 네모 동그라미를 그려도

대답하지 않는 네모를 중얼거리면서

우린 아파도 심심하니까

그래도 정확하게 발차기하는 나를 보고

운동치료 덕분이라고 하지만 그건 눈사람의 뒤통수 이야기

먹물로 그린 나무 이파리들의 이야기

뿌리 없는 나무를 따라가

눈코 귀가 없는 나를 나무 그늘 속에 묻고 와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색을 지나

내일은 적당히 추울 거예요

떼쓰지 않는다고 쓰다듬는 머리에

내가 묻지 않는 대답을 그려요

소풍

뒷산 가는 길엔 불에 데지 않은 패랭이가 피고 있겠지

일찍 잠든 돌멩이를 발로 차지 않을 거야

사마귀 날개 같은 여기에서

폭설을 모르는 발등에 입을 맞추고

현관에 붙은 밴드가 어떻게 손을 내밀어

커다란 슬리퍼에서 뒤꿈치가 흘러내려

패랭이꽃 전설처럼 낭떠러지는 조심하고

눈 감아도 환하게 우리 집을 그렸어

없는 사람들은 평화롭게 얼어붙은 쪽에

대문 잠그고 웃는 사람들도 꽁꽁 묶어 다정하게

방부제를 먹은 김밥처럼

지워지기 전에 풋마늘을 먹어 주먹을 이겨야지

편의점에서 곱셈을 팔까 어떻게 초코파이

주렁주렁 펀치를 날리는 가로등을 지나

착지하기 전 오버로크 한 밤을 풀어야지

여덟 살을 잃어버린 연필에 침을 바르고

아프지 않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면서

빙그레 돌림노래를 불러야지

구석구석 오늘 알림장에 적어도 되나요

바닥을 보여줘도 죽은 손들이 올라오는데

안티프라민 맑은 손을 잡고

한 움큼 약국으로 놀러 가요

처음부터 끝까지 소풍이었을까

봄가을 없이 단 한 번,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십자가 앞에 모은 손들이 소풍을 불러

일찍 잠든 돌멩이가 수북하게 쌓이는데

국민은행 달력 3월에는

항아리에 고양이를 심었다

자라지 않은 고양이 그러니까

누워서도 이해하기 쉬운 그림

고양이는 나비를 기다린다

그건 기다리다 지친 화가의 마음

춘분은 아직 멀었다 봉오리 같은 숫자들

그렇게 보면 달력은 20대로 보이지

한 시간째 고양이는 나를 보고

나는 고양이가 자라길 기다리고

우린 자라는 걸 잊어버리고

잔치국수 먹을 시간 털이 날린다

주말 아트센터에선 세탁소 습격 사건

희망 도서에 살림을 차리면

수리 중인 엘리베이터는 4층에서 멈추고

모네의 정원에서 고양이가 핀다

3월이면 요정들이 비밀번호에 물을 주거나

물뿌리개에 반달을 꽂고 젖은 나를 털고

활짝 핀 문으로 들어오세요

나비 심기 좋은 달이에요

춘분이 울창해지길 기다린다

호주머니를 뒤지면 모르는 숫자

괜찮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수목금토성이 있으니까

빨간 지붕 회전 초밥은 문을 닫고

아낌없이 주는 김밥집이 생겼다

펄럭거리는 플래카드 아래서

쌓인 눈이 녹으면 무엇을 만날까

장다리꽃 통조림이라도 살까

화장품 샘플이 굴러떨어지고 달아나고

멈춘 시계 약을 갈아서

삼월이 돌아오기 좋았다

고양이가 항아리에서 나와 허리를 편다

발톱이 자라는 종이꽃이 한 송이씩 피고 있다

여름에 버린 것들

은행나무로 물고기를 깎았다

지느러미는 생략했다

눈을 파는 일에만 집중했으니까

둥글게 시작했으나 끝은 둥글지 않았다

물고기의 눈이 하나였을 때

비늘 없는 세계를 보았다

눈을 파는 일에만 집중했다

물결이 일렁이는 눈가에선 헤엄치기 좋았다

비뚤어진 등허리가 반질거렸다 마치 어제를 지운 것처럼

손가락으로 오래 문질렀다 그건 다시 내일 같았다

물고기에서 물고기의 온도까지

지느러미 없이 도착할 수 있다고 손뼉을 쳤다

물고기와 눈이 마주쳤을 때

은행잎이 지느러미처럼 돋는 칠월이었다

*

색유리로 노을이 번지는 순간

우리는 성당 지하를 출발했다

신호 없는 거리를 돌아다녔다

넷인지 다섯인지 모르는 발가락으로

걸음을 뭉쳤다 뱉으면서 헤엄치기 좋았다

고개는 위협적이지 않을 만큼 쳐들어 여름을 보았다

파란 바탕에 붉은 자주가 박힌 등판 무늬가

정오의 머리 꼭대기를 지켰다

도마뱀의 눈에서 구슬이 떨어지거나

여러 개의 태양이 끌려 나오기도 했다

꼬리는 Ω처럼 말아서 뒷발에 붙였다

단단한 것은 다 뒤에 있었다

꼬리를 자르지 않는 자신감을 오래 바라보았다

*

플라스틱 행운을 믿었다

수만 번 부활했던 자리마다

꼬리가 잘린 꽃이 필 거라고 주문을 걸었다

그러나 이제 지느러미가 돋지 않는

더 이상 자르지 않는 꼬리를 키우지 않기로 했다

셔터를 누르자 다시, 여름이었다

나방

어제는 나보다 작은 나방을 죽이고

오늘은 나보다 큰 나방을 죽이고

작은 것들은 커지고

작아서 너무 큰 것들은

붉은 달이 뜨는 밤

계수나무에 목매달 것들이 너무 많아

하나를 매달면 또 하나가 웃는

아무도 잠들지 않는 밤

겹겹 분가루를 날리면서

어둠의 바깥을 쏘아보는

계수나무 잎이 돋아

죽은 것들의 맥박 뛰는 소리가 들려

체감온도는 모르겠어

보호색이 없는 우울을 지나

밤을 다 써버린 색깔을 골라

붉은 달이 뜨는 밤

정지비행을 잊고

아무렇지 않게 휙, 북쪽을 치면

꿈 밖은 온통 나방의 세계

나방이 나방을 이해할 때까지

흰색이 돋을 때까지 흰색을 칠하면서

붉은 달을 무너뜨리면서

날개는 끝까지 젖지 않아

달빛은 저쪽이야 북쪽도 저쪽이야

이쪽엔 나방을 죽이는 방법만 살고 있어

나방을 고쳐 읽는 밤, 환생은 없어

무성한 행운을 빌어

라디오 소리 좀 줄일까요?

아욱국을 끓이자 많이 자랐구나

아욱을 몰라요 질문 없는 한해살인가요

시간의 길이를 계산하고 있어요

소금 한 주먹 넣고 바락바락 씻어라

보이지 않는 불순물이 많단다

보이는 것도 다 씻지 못하고 살아요

변명은 필요 없단다

푸른 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씻어라

오늘 길이는 나중 계산하고

그런데 일곱 살은 어디로 갔니

라디오 소리가 너무 커요

쌀뜨물을 받아라 잡내 제거에 도움이 된단다

아욱에 무슨 잡내가 있나요

잡내는 어디에나 있단다

보이지 않는 것들은 구별하기 힘들어요

3차원의 원근법은 무시해도 된다 얘야 

멸치 대가리를 떼고 된장을 풀으렴

팔팔 끓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들이 있구나

자다 깬 아욱꽃의 시간도 있어요

한해살이에 집착하지 말아라 멸치가 떠오르는구나

꽃의 온도를 재는 꺾은선 그래프 같아요

아침도 없이 오는 연체이자 같구나

아욱을 쥐어뜯어 넣어라

미끈거려요 미끄러지겠어요

사춘기를 생각하니 부드러움에 집중해라

풋내 없이도 가라앉는 것들이 있구나

가을 아욱국이다 문 닫고 먹어라

가을까지 살았군요

너무 팔팔해서 걱정이다 넌

분수의 곱셈 없이도 가을은 온단다

숨어드는 잡내를 조심하거라

그런데 너는 몇 살이니 꽃이 작구나

저는 이제 열두 살이에요

소금은 언제나 제 자리에 있단다

 

 

 

 

아르코 창작기금 발표지원 선정작

 

https://webzine.munjang.or.kr/archives/156493

 

 

 

         이신율리 시인

         2019년 오장환신인문학상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