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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화요 파스타 - 이신율리 《열린 시학》2022년 여름호 우선 화요 파스타 - 이신율리 우린 화요일을 우선합니다 파스타만 먹는 고양이를 빌려오고 녹색 화병에 파르팔레 파스타 일 인분을 꽂는다 나비의 시간으로 30초 동안 나비가 된다 늦게 도착한 휘파람을 찧어 마법의 소금을 만든다 화요일에 맞춘 산사나무 식탁을 위해 높은 솔을 묶는다 악몽을 꾸고 난 다음 날 파스타를 만들어 생일이 태어나고 수국은 분홍으로 변하고 우선 푸른 나비를 고양이에게 먹인다 병아리콩이 뛰어다니는 화요일을 식탁 위 쓸데없이 즐거운 고양이를 앉히고 먹어, 프라이팬의 날씨야 고양이는 파스타와 레몬 어느 것에 가까울까 나는 새콤하게 와 익숙하게를 경멸한다 자라거나 익기를 거부한다 파스타와 나 사이의 화요일을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계간 『열린시학』 2022년 .. 2022. 7. 9.
염소 - 이신율리 《시와 편견》2021년 겨울호 염소 - 이신율리 봄이 오면 아버지는 염소 새끼를 끌고 왔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내 다리를 묶었 어 냉이꽃 들판을 휘돌아 쳐도 심통은 풀리지 않았지 염소는 뒤꼍에 꽁꽁 묶어놓 고 닭장 속에 갇힌 거위 등에 올라타 마징가 제트처럼 날고 싶었지 뿔 자리가 아 직 벌어지지도 않은 애송이가 대가리를 번쩍 쳐들어 내 봄을 파먹었어 딱 한 번 이라도 배때기를 걷어차 풀밭에 쫙 뻗었어야 했는데 그때 내 눈엔 네가 아버지로 보였어 수업료 안 냈다고 벌서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거든 * 하얀 꽃은 구겨 삼키고 싶다 구름 아래 냉이꽃을 꺾는다 최신 가요에 맞춰 춤을 추면 봄비가 내릴 거라고, 점점 하늘이 내려오고 뿔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지겹다고 화성으로 날라버린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쭉 빠진 알파고 옆에 끼고.. 2021. 12. 22.
윤숙노* - 이신율리《사이펀》2021년 여름호 윤숙노* - 이신율리 소매 길이를 잰다 풀어진 머리칼을 제치면서 잰다 짜증 낼 수 없다 귀신은 아무 때나 팔을 내주지 않으니까 버선을 넣어 만든 액자가 기울어 새벽종이 울린다 애썼다고 입에 땅콩 알사탕을 넣어준다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귀신은 존댓말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귀신이 잘 보여 존댓말을 모른다 귀신은 옷고름 길이가 봄날보다 짧다고 투정했다 할머니는 섭섭해서 남산에서 목련처럼 울었다 붉은 치마가 더 붉은 날이었다 귀신은 금박을 무서워한다 금박 속에 귀신이 산다고 믿는다 할머니는 좋아한다 샛노란 끝동에 복복福자를 찍었다 귀신처럼 감쪽같다 할머니가 귀신처럼 웃는다 소매에서 팔을 뺄 때마다 팔이 자꾸 생겨났다 쉬지 않고 팔을 만든다 이제 색깔 옷은 지겹다고 할머니는 종로 3가 골목이 꽉 차도록 검은색 당초무.. 2021. 8. 13.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 이신율리《사이펀》2021년 여름호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 이신율리 에코 없이 귀를 여는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가을 아버지 괜찮을까 첼로 끝에 붙어있는 도돌이표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 음이 낮을수록 통증이 궁금하다 무반주 첼로 음악처럼 꺾이지 않고 차갑지 않게 전망 좋은 창에 말없는 천사라도 심어야지 사철 시들지 않는 아버지의 귓속말을 모아 무반주 재봉틀을 만들었다 노을이 절취선을 따라 박음질했다 창문 밖으로 하나 둘 봉분이 늘어가 내가 사는 이곳도 산딸기 무덤 낮은 목소리로 반주 없이 봉분을 열어봐 가보지 않은 산책길이 여름방학처럼 살고 있어 그곳에는 꼭 내가 모르는 내가 사는 것 같아 주술에 걸린 아버지가 자꾸 태어나고 가문비나무 속에서 오래된 첼로가 걸어 나와 바흐를 좋아하세요 메시지를 보내면 구름 사이로 아버지는 만월로 차오르고.. 2021. 6. 14.
시를 쓴다는 일 글을 쓴다는 일 내 글을 옮겨다 놓은 걸 보는 일, 그리고 깜짝 놀라 감사하다고 댓글을 썼다 지웠다 하는 일 "그 시인의 시가 좋다고 생각하면 끝까지 좋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을 듣는 일, 그러니 끝까지 좋아야 하는 일 남의 시선 생각하지 말고 내가 나도 무시하고 쓰세요. 내 안의 검열자를 지우고 쓰고 싶은 글을 쓰세요 잘 쓰고 있는 거라고 "모르는 과자 주세요"는 지금 읽어도 너무 좋다고 응원을 해 줄 때 몇 편의 시로 집중 조명해볼까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면서 나중에요 나중에 그럴 때 언젠가 어느 평론가가 쓴 글 중에 "가슴을 뛰게 하는 시를 쓰는 사람은 시인이 아니고 등단하기 전 열심인 습작생뿐"이라고 했다. 그 말이 맞는다고 생각했다 이제 시인이 되고 나서 집중하지 못할 때마다 새겨두었던 평론가.. 2020. 7. 9.
매화 이황 뜰앞에 매화나무 가지 가득 눈꽃 피니 풍진의 세상살이 꿈마저 어지럽네 옥당에 홀로 앉아 봄밤의 달을 보며 기러기 슬피 울 제 생각마다 산란하네 두향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어 어느덧 술 다 하고 님 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 올해는 매화.. 2020. 1.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