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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율리192

그 여름은 어디 갔을까 그 여름은 어디 갔을까 그 여름 능소화는 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바람도 불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동네 끝자락에 사는 할머니 댁으로 심부름을 갔다 “부추 좀 사 와” 나는 소쿠리를 들고 두 걸음씩 뜀뛰듯 날아가듯 능소화 보러 갈 때만 걸었던 걸음이었지 그러니까 능소화 걸음인 거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의 허리를 보면 그 집 아저씨가 떠올랐어 키 크고 잘생겨 꼭 탤런트 같았던 아저씨와 키 작은 아줌마 아저씨는 퍽 하면 바람이 났고 아줌마는 퍽 하면 울고 다녔던 기억 그래서 할머니 등이 저렇게 굽었나 하는 생각을 하느라 얼마치 주세요 하는 얘기도 잊어버리고 능소화는 부추 밭가에 가죽나무를 타고 올라가는데 세상에 없는 꽃 같았어 어떻게 저런 빛깔로 대롱대롱 매달려 피느냐고 우리 집 마당가엔 가죽나무가 두 그.. 2022. 7. 30.
칸나와 폐차장 - 이신율리『한국문학』2022년 하반기호 칸나와 폐차장 - 이신율리 흩어졌다 모이는 이름에 리본을 단다 가벼워지고 싶은 것끼리 등을 보일 때 그때, 여름보다 느리게 칸나가 핀다 새를 먹은 돌이 유리벽을 뚫고 날아오를 수 있을까 시들기 시작하는 것들은 기억을 털어 날개를 말리더라 아는 곳에서만 멍 자국을 씻는 저녁 젖은 깃털처럼 무거워지는 쪽으로 칸나가 난다 구름 정도는 휘어잡을 수 있는 곳에서 기다리는 새가 핀다 이름표가 떨어져 낯선 자리마다 셔터를 내린다 안을 수 있는 것들은 가렵다가 간지러워서 선인장에 음표를 달아주거나 비밀번호를 빌려준다 컵라면이 먹고 싶은 코끼리 좋아하는 노래를 들려주던 쪽으로 여름이 온다 아무리 걸어도 부르트지 않는 미등이 가장 늦게까지 살아남아 가벼워지는 등을 비춘다 폐차장 가는 길에 붉은 칸나가 핀다 흩어졌다 모이는.. 2022. 7. 28.
그림 편지 - 이신율리 『한국문학』 2022년 하반기호 그림 편지 아이는 열두 컷 편지를 가졌다 그것은 열두 잎을 가진 나무의 이야기 아무도 오지 않는 저녁 잎사귀 끝에서 울면 북쪽이 될까 쌀을 씻으면 늙은 개처럼 차분해질까 편지는 어디든 갈 수 있다 붉은 꿩이 날아간 방향이라면 이파리들은 구름 한 채 짓고 아이는 기린이 되고 지붕에 걸린 연을 보느라 편지지 밖으로 발이 빠지고 살구나무가 좋아 저녁으로 사람들이 고인다고 아이가 그림 속으로 들어간다 거기, 내가 화분마다 물을 준다 고장 난 시계태엽을 돌리고 저녁도 없이 밤을 부른다 어둠이 발등에 차린 밥상, 물컹한 가지 조림을 먹고 찬물을 마시고 찬물은 나를 빤히 올려다 보고 식탁 끝이, 언제부터 절벽이었나 생각할 때 멀리서 달려오는 편지가 내게 팔베개를 한다 그림을 그리면 손바닥 만하게 커지는 그 저녁이 우.. 2022. 7. 20.
엄마의 해바라기 엄마 영양제를 해바라기에 주나봅니다. 씩씩하게도 키웠습니다. "딸, 엄마 해바라기야" 톡으로 해바라기가 왔습니다. 2022. 7. 17.
젊은 시인의 視線, 詩選 - 《열린 시학》 2022년 여름호 고선경 - 202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 이신율리 - 2022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 채윤희 - 202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작품론 - 일상에 대한 시적 전략 / 황치복 문학 평론가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긴 주말, 유행이 지난 소풍, 식탁보의 아름다운 레이스는 누구의 솜씨 - 고선경 내일 인도달력, 화요 파스타, 영광 택시 - 이신율리 고양이로 불리는 일, 나나는 레몬을 좋아해, 아스피린 사용법 - 채윤희 - 고선경, 채윤희, 이신율리의 새로운 시선 - 황치복 1. 일상의 미세한 균열들 - 고선경 2. 일상의 특별한 사건들 - 채윤희 3. 일상에 날아드는 마법 - 이신율리 일상을 이루고 있는 요소 가운데 음식처럼 흔히 호명되는 것이.. 2022. 7. 13.
영광 택시 - 이신율리 《열린 시학》2022년 여름호 영광 택시 - 이신율리 발걸음을 세는 일은 맑거나 흐려지는 날씨 그걸 숫자로 바꾸는 일은 잘라버린 꼬리가 자라는 동안 뒤축이 닳은 미터기를 고친다 행진곡을 따라 떠났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미안해요 난 이제 지도가 없어요 어떤 꼬리들도 그렇다 미터기 속 아이 웃음소리가 살고 새로 난 길이 가라앉거나 떠오르지 않는 살림살이가 좌표도 없이 떠 있다 답은 0이 되거나 밥이 익는다 해나고 바람 불지 않아도 뒤축이 닳는 오늘 반숙 달걀이 첫눈 내리는 표정처럼 명랑할 수 있다면 돼지비계의 마술처럼 사월이 끓거나 씀바귀처럼 알약이 써도 되겠지 더 이상 소화할 것이 없을 때 빈 영수증에 얼굴을 덜어 적는다 빨간 신호에도 멈추지 않는 숫자는 자다가 그린 그림 같아 겹치는 색이 많을수록 정지 버튼을 눌러 공터마.. 2022. 7.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