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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나야/발표 시36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세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비 오는 날의 스페인 - 이신율리 죽는 사람들 사이로 날마다 비가 내린다 사과는 쓸모가 많은 형식이지 죽음에도 삶에도 수세미를 뜬다 사과를 뜬다 코바늘에 걸리는 손거스러미가 환기하고 가는 날씨 를 핑계로 미나리 전이나 부칠까 미나리를 썰 때 쫑쫑 썰어대는 말이 뒤섞인들 미나리 탕탕 오징어를 치며 바다가 보인대도 좋을 다행히 비 내리는 날이 많아 그 사이로 사람이 죽기도 한다 올리브 병에서 들기름이 나오면 핑계 삼아 한판 사과나무에서 다닥다닥 열린 복숭아를 다퉈도 되고 소금 한 주먹 넣으며 등짝도 한 대 단양과 충주 사이에 스페인을 끼워 넣는다 안 될 게 뭐 있어 비도 오는데 스페인보다 멀리 우린 가끔 떨어져도 좋을 텐데 철든 애가 그리는 그림 속에선 닭 날개가 셔터를 내리고 오토바이를 탄 새가 매운 바다.. 2022. 1. 2.
염소 - 이신율리 《시와 편견》2021년 겨울호 염소 - 이신율리 봄이 오면 아버지는 염소 새끼를 끌고 왔지 나비처럼 팔랑거리는 내 다리를 묶었 어 냉이꽃 들판을 휘돌아 쳐도 심통은 풀리지 않았지 염소는 뒤꼍에 꽁꽁 묶어놓 고 닭장 속에 갇힌 거위 등에 올라타 마징가 제트처럼 날고 싶었지 뿔 자리가 아 직 벌어지지도 않은 애송이가 대가리를 번쩍 쳐들어 내 봄을 파먹었어 딱 한 번 이라도 배때기를 걷어차 풀밭에 쫙 뻗었어야 했는데 그때 내 눈엔 네가 아버지로 보였어 수업료 안 냈다고 벌서던 일이 자꾸만 떠올랐거든 * 하얀 꽃은 구겨 삼키고 싶다 구름 아래 냉이꽃을 꺾는다 최신 가요에 맞춰 춤을 추면 봄비가 내릴 거라고, 점점 하늘이 내려오고 뿔이 딱딱해지기 시작했다 웃음 소리가 지겹다고 화성으로 날라버린 그를 찾으러 갔다 그는 쭉 빠진 알파고 옆에 끼고.. 2021. 12. 22.
윤숙노* - 이신율리《사이펀》2021년 여름호 윤숙노* - 이신율리 소매 길이를 잰다 풀어진 머리칼을 제치면서 잰다 짜증 낼 수 없다 귀신은 아무 때나 팔을 내주지 않으니까 버선을 넣어 만든 액자가 기울어 새벽종이 울린다 애썼다고 입에 땅콩 알사탕을 넣어준다 나이를 먹지 않아서 귀신은 존댓말이 필요하다 할머니는 귀신이 잘 보여 존댓말을 모른다 귀신은 옷고름 길이가 봄날보다 짧다고 투정했다 할머니는 섭섭해서 남산에서 목련처럼 울었다 붉은 치마가 더 붉은 날이었다 귀신은 금박을 무서워한다 금박 속에 귀신이 산다고 믿는다 할머니는 좋아한다 샛노란 끝동에 복복福자를 찍었다 귀신처럼 감쪽같다 할머니가 귀신처럼 웃는다 소매에서 팔을 뺄 때마다 팔이 자꾸 생겨났다 쉬지 않고 팔을 만든다 이제 색깔 옷은 지겹다고 할머니는 종로 3가 골목이 꽉 차도록 검은색 당초무.. 2021. 8. 13.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 이신율리《사이펀》2021년 여름호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 이신율리 에코 없이 귀를 여는 바흐의 음악은 과분해서 가을 아버지 괜찮을까 첼로 끝에 붙어있는 도돌이표에서 바닐라 향이 난다 음이 낮을수록 통증이 궁금하다 무반주 첼로 음악처럼 꺾이지 않고 차갑지 않게 전망 좋은 창에 말없는 천사라도 심어야지 사철 시들지 않는 아버지의 귓속말을 모아 무반주 재봉틀을 만들었다 노을이 절취선을 따라 박음질했다 창문 밖으로 하나 둘 봉분이 늘어가 내가 사는 이곳도 산딸기 무덤 낮은 목소리로 반주 없이 봉분을 열어봐 가보지 않은 산책길이 여름방학처럼 살고 있어 그곳에는 꼭 내가 모르는 내가 사는 것 같아 주술에 걸린 아버지가 자꾸 태어나고 가문비나무 속에서 오래된 첼로가 걸어 나와 바흐를 좋아하세요 메시지를 보내면 구름 사이로 아버지는 만월로 차오르고.. 2021. 6. 14.
토마토 모자 - 이신율리《다층》2020년 겨울호 토마토 모자 - 이신율리 토마토가 달린다 짭짤이 토마토가 달린다 빨강은 멈추지 않 고 졸음 쉼터를 지나친다 시속 110km가 고속도로를 쫓아온다 추월하는 울트라 토마토, 주차장은 불어 터진 스파게티 같아 화 장실은 멀고 호두과자 줄은 너무 길어 출렁거리는 휴게소에서 하모니카를 분다 화분 속에서 토마토 가 익는 사이 낮달 속으로 귀가 사라진다 토마토 모자를 벗는다 노래할 때마다 하모니카를 불어주던 외삼촌은 어디 있을까 늘 어진 테이프에서 트로트를 걸치고 사라졌던 외삼촌이 나올 것 같아 반달을 부른다 모자를 쓴다 잘 익은 토마토 모자를 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토마토 냄새를 알아가는 거라고, 하모니카 소리 가 강물을 타고 들려왔다 강물로 박자를 맞추던 외삼촌이 하모니카를 불면서 모자에서 흘러 나왔다 짭짤이 .. 2021. 5. 16.
사다리꼴 삼각형 - 이신율리《다층》2020년 겨울호 사다리꼴 삼각형 - 이신율리 날아올랐는데 컵이었냐고 묻습니다 눈 속에서 자몽주스가 깨졌습니다 몇 군데로 분산되었습니까 낙하를 꿈꾸다 뾰족한 것들은 나이를 숨깁니다 컵 받침 아래 감춘 스커트가 날립니까 쓸데없는 부분에서 감정이 터집니다 날아오르는 것에 X표를 칩니다 셔틀콕이 토요일 오후까지 날아갑니다 뒤로 걷기 시작입니다 해당화를 이마에 붙이고 수리수리 연애 심리 테스트라도 받아보겠습니까 충분한 높이에 테이핑을 해주세요 깨진 컵과 똑같은 컵을 찾아다니는 것도 수리입니다 날아오르는 기분에 관심 있습니다 귓속에서 소리가 날아오릅니다 몇 개의 귀입니까 붉은 스티커가 조용해집니다 고양이가 돌아보는 곳까지 저녁입니다 굴러가는 소리까지 고양이입니다 일기장에 깨진 컵이 도착합니다 밤의 중간입니다 컵에 맺혀있던 햇빛 조.. 2021. 4. 11.